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아펜젤러 (문단 편집) == 여러 에피소드 ==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금으로서 보면 참 기상천외한 일들도 많고 아펜젤러의 [[대인배]]스러운 면모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.[* 사실 정상적인 선교사라면 매우 온정적인 성품을 갖는 게 당연한 것이다.] * [[이승만]]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승만은 개교 이후 초기의 제자 중 한명이었다. 이승만이 젊었을 적에는 하도 자주 순경들에게 붙잡혀 구금되어서, 관할 경찰서에 가서 어려서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해명하여 구치소에서 빼오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. 하지만 결국 이승만은 [[독립협회]] 활동 및 [[만민공동회]] 활동을 하다가 5년 7개월간 투옥된다. * 그의 아들인 헨리 도지 아펜젤러는 교장직을 맡으며 배재학당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. 다만 아펜젤러의 후손들이 직접적으로 학교 운영에 손을 댄 건 아들 헨리까지였다. * 헨리 다지 아펜젤러 이후의 아펜젤러의 직계 후손들도 배재재단과 현재까지 관계를 맺고 있다. 매년마다 그의 후손들이 한국과 [[배재고등학교]]를 방문하며, 상술한 아펜젤러의 동상 앞에서 조상의 봉사와 희생을 기리는 시간을 갖는다. * 한편 딸 앨리스 아펜젤러는 기록상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으로 [[이화학당]] 제6대 당장이 되었다. 앨리스는 이화학당 대학과를 [[이화여자전문학교]]로 개편하고, 이화여전을 정동[* [[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]]는 정동에 그대로 남았으며, 1943년 이화여고보와 [[이화여전]]의 재단이 분리되었다. 1992년에는 정동에 [[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]]도 세워졌다. 오늘날 [[이화여고]]와 [[이화외고]]는 학교법인 이화학원에서, [[이화여대]]와 이화여대 부속학교들은 학교법인 이화학당에서 운영하고 있다.]서 신촌[* 現 [[이화여자대학교]] 캠퍼스. 이대부속유치원, 이대부초, 이대부중, [[이대부고]]도 함께 있다. 단 이대병설영란여중과 [[이대병설미디어고]]는 [[중랑구]]에 있다.]으로 옮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. * [[한복]]도 즐겨 입었다고 한다.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한복을 입히기도 하고. 아펜젤러와 그의 가족들이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. * [[1886년]]도에 [[한양]]에 [[콜레라]]가 크게 창궐하자 조선 왕실은 [[제중원]]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국고를 쏟아부었는데 중간에 [[탐관오리]]들이 이 구제비를 야금야금 빼어가자 화가 몹시 나서 아펜젤러의 평소(?) 이미지와는 다르게 [[부정부패]]를 저지르는 관리들에게 가열찬 [[독설]]을 쏟아 부었다.[* 그도 그럴 것이 여러 항목으로 나뉘어진 구제비(제약비, 인건비 등) 중에서도 당시 돈으로 '''1만 달러(!)''' 가량이 [[제물포]] 등지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하고 운영에 쓰도록 책정되었는데, 이를 탐관오리들이 홀라당 먹어버렸다.] * 하루는 자택에서 쉬던 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노비 계급의 어린 여자아이가 쓰러져 죽음 바로 직전에 있었다고 한다. 이 아이 역시도 콜레라에 걸려있었는데, 아펜젤러는 감염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안에 들여 아이의 마지막 길은 그나마 따뜻하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. [각주] [[분류:감리회 목사]][[분류:미국의 목사]][[분류:감리회 선교사]][[분류:미국의 개신교 선교사]][[분류:스위스계 미국인]][[분류:독일계 미국인]][[분류:몽고메리 카운티(펜실베이니아) 출신 인물]][[분류:조선의 인물]][[분류:1858년 출생]][[분류:1902년 사망]][[분류:대학교 설립자]][[분류: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안장자]][[분류:해상사고로 죽은 인물]][[분류:익사한 인물]][[분류:대학교 설립자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